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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의 옛 담 너머] 병이 낫고 나니 봄바람은 가 버렸고

현호정 칼럼 –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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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 소설가가 포착한 ‘나를 아프게 하던 존재를 약으로 여기는 순간’. (2024.08.20)


현호정 소설가가 신화, 설화, 전설, 역사 등
다양한 옛이야기를 색다른 관점에서 읽으며,
현대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을 전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pexels.

수능을 치른 다음 날이었다. 느긋하게 교실로 들어온 친구 하나가 책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반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수능은 만병통치약인가 봐! 내 모든 병이 다 나았어!”

와그르르 함께 웃던 순간의 순수.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은 우물에 소중히 고여 시시로 가문 밭을 축이게 한다. 자기 병의 원인을 자기 병의 약이라 불러주던 그 애의 목소리에 자조는커녕 한 방울의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는 건 신비한 진실이다. 그 애는 정말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수능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과 수능이 병의 약이라는 판단은 충돌하지 않으며, 병의 원인으로서의 수능과 약으로서의 수능은 공존 가능한 개념이라고. 그때 나는 그 논리가 이치에 맞는지는 몰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근래 다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생리를 시작해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친구 미섭이 “너 이제 팔자 폈다, 축하해!”라고 답해준 거다. 생리 전 증후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시작을 했으니 끝도 날 테니까. 이렇게 아프고 앞으로 여러 날 더 아프겠지만 거짓 없이 기쁜 마음으로 축하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만드는 존재로서의 생리와 고통을 없애는 존재로서의 생리가 맞물린 채 그저 받아들여졌다. 이때 나는 이 공존이 아름다운지는 몰라도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다.

나를 아프게 하던 존재로부터 멀어지면서 내가 그걸 약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니 야릇하다. 사전적 의미로 병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1 이다. 인간은 한 현상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떠나가는 쪽은 오히려 현상이 아닐까. 조선 시대 사람들이 천연두를 ‘손님’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떠올린다. 위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역병이 부디 순하게 머물다 고이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손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마음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손님신’이 천연두를 앓게 하는 역할 뿐 아니라 낫게 하는 치료 신 역할까지 수행한다2 는 설정이 환대의 순수를 수호했다. 책 『신탁 콤플렉스』에 따르면 “손님신의 의미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쪽은 손님네를 맞이하는 인간들이다. 환대와 적대(박대)에 따라 손님신의 성격과 의미는 재구성된다.”3 손님굿에서도 신을 잘 대우한 노고할미는 보호를 받지만, 손님신 중 하나인 ‘각시손님’에게 하룻밤 자 주면 배를 빌려주겠다고 지껄인 뱃사공은 목이 잘리고 그의 일곱 아들도 전부 천연두에 걸린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만은,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인 이조년이 지은 이 시조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마지막 구절로 잘 알려져 있다. 다정이라는 병과 환대의 전략을 나란히 놓고 싶어진 건 어떤 예감에서였다. 질문 하나. 우리는 병과 같은 다정이 우리의 대문을 두드릴 때에 환대할 것인지 박대할 것인지 자기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질문 둘. 다정은 환대를 받으면 순해지고 박대를 받으면 사나워지는가? 그러니까, 나를 아프게 한 다정은 내가 박대해서 사나워졌던 걸까?

‘다정’을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겠으나 나는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보고 싶다. 누굴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됐을 때 말이다. 내가 이 존재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말 것을 그냥 알게 되는 순간에 말이다. 품으로 파고드는 커다란 병에게 환영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었을까. 사랑은 늘 환대할 수밖에 없는 손님이자 늘 사나워져 아프게 하는 손님이라는 점이 싫고 이상하다. 그래도 나는 가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고 했다. 난 그냥 무한히 앓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낫고 싶지 않았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래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배꽃에 달빛 희고 은하수 깊은 밤, 봄에 마음을 걸어두었던 나뭇가지에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소쩍새가 앉아 있다. 앓던 시절이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젠가 돌아가게 된대도 그곳은 이미 내가 아는 그곳이 아닐 것이다. 남은 슬픔을 모두 거기 바친다.

병이 낫고 나니 봄바람은 가버렸고 / 病起春風去

시름이 많아 여름밤도 길구나 / 愁多夏夜長

잠깐잠깐 잠자리에 들었다가 / 暫時安枕?

금방새 고향을 그린다네 / 忽已戀家鄕

불을 붙이면 솔그을음이 침침하고 / 敲火松煤暗

문을 열면 대나무가 시원하게 느껴져 / 開門竹氣?

아마 저 멀리 소내 위에는 / 遙知苕上’月

달그림자가 서편 담을 비치련만 / 流影照西墻4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병4 (病)’의 첫 번째 뜻 -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

2 조현설, 『신탁 콤플렉스』, 이학사, 2024, 131~132면.

3 같은 책 135면.

4 정약용, 「밤」, 『다산시문집』 제4권.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 1994.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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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호정(소설가)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등을 썼다. 2020년 박지리문학상,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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